사람의 일, 즉 사랑이란 것이 생각하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이별의 고독을 세웠던가. 그것은 부지기수로 셀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데도 더러는 이별을 체험한다. 그뿐인가. ‘원증회고(怨憎會苦)’의 고통은 또 어쩌라고. 미워하는 데도 증오하는 데도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그 고통 또한 사람의 일로 다가온다. 사람의 일/천양희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사람과 만나면
내가 최애하며 자주 산책하는 코스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연꽃마을에서 시작해서 머루터널을 지나고 강가에 느티나무와 직면한다. 그러다가 토끼섬을 한 바퀴 돌고는 이어지는 길을 따라서 다산생태공원 목적지에 닿는 하루는 마냥 행복하다. 다산생태공원은 북한강을 끼고 있는데 특히 연꽃과 나무 푸르른 잔디 흰 구름이 흠모하는 강물과 함께 돋보인다.산책/조병화참으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참으로 당신과 함께 앉고 싶은 잔디였습니다당신과 함께 걷다 앉았다 하고 싶은나무 골목길 분수의 잔디노란 밀감나무 아래 빈 벤치들이었습
나이 오십, 지천명(知天命)이 되어서야 사람은 변심이 ‘나’인줄 깨닫는다. 당신의 시선은 수국인 채 나에게 왔다는 것을 겨우 간수하며 간신히 동공에 눈부처를 허락한다. 시선이 오고가는 것, 즉 취산(聚散)에 숨죽인다. 쉽게 일희일비(一喜一悲)로 ‘당신’을 향해 반응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천명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을 53세의 화가 모리조는 이웃집 두 자매와 수국을 통해서 어느 날, 이해한 것이다.취산화서/송재학수국 곁에 내가 있고 당신이 왔다 당신의 시선은 수국인 채 나에게 왔다 수국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잠깐 숨죽이는
최고의 애인(친구)은 말이 필요 없다. “무언無言, 무언으로 피어”내는 지속적인 관계가 자고로 사랑으로 서로에게 스며들고 형성되어 닮아가기 때문이다. 산모퉁이 아래 아늑한 곳에 흐드러지게 핀 수천수만 찔레꽃 송이를 보며 시적 주체는 “그렇게 그대 대신”으로 사랑의 대상을 갈음한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찔레꽃/송기원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어질머리 흔들리는 봄날 저녁이면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그런 지경에서꿈결같이 사람냄새를 맡곤 하였습니다.한 번 돌고, 두 번 돌고, 또다시 도는그런
어떤 시를 읽으면 그림이 훅 밀려온다. 무슨 생각이 파도를 만난 배처럼 꿈틀 반응한다.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 )이 쓴 「그대 가까이 2」도 역시 그러했다. 시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적 화자가 그림 속 여인처럼 불쑥 들어왔다.그대 가까이 2/이성복자꾸만 발꿈치를 들어보아도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원
장석남의 시「옛 노트에서」에 등장하는 몇 줄의 시와 ‘나’는 조선 화가 김홍도가 그렸다는 그림 의 등장하는 한 미모의 여인을 시적 주체로 견주어 읽기에 더없이 좋다. 몇 줄의 시의(詩意)를 베낀 김홍도(金弘道, 1745~1806) 그림이 은근 품고 있기 때문이다.옛 노트에서/장석남그때 내 품에는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바람이 풀밭을 스치면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이 세계 바깥까지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만들 수 있었던가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좇아서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그리고 간신히
허수경의 시에서 “어린 연두 물빛이 네 마음의 가녘에서/숨을 거두며 살랑거렸”다는 구절은 한마디로 사랑에 깊이 남녀가 빠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씌었을 때’를 은유하고 시사한다. 다시 말하자면, 콩깍지는 “네 눈이 바라보던/내 눈의 뿌연 거울”로 드러난다.오래된 일/허수경네가 나를 슬몃 바라보자나는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어린 연두 물빛이 네 마음의 가녘에서숨을 거두며 살랑거렸는지도오래된 일봄저녁 어두컴컴해서주소 없는 꽃엽서들은 가버리고벗 없이 마신 술은눈썹에 든 애먼 꽃술에 어려네 눈이 바라보던내 눈의 뿌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어느 집 담벼락에서. 혹은 아무도 걷지 않으려는 길 위에서. 나는 배싸매무초(배낭 싸고 매고 무작정 초행길)를 외치며 또 라일락 꽃 향기를 맡으며 종일 비가 내려도 웃다가는 그만 집으로 되돌아올 것이다.라일락/도종환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향기는 젖지 않는다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출렁 허리가 휘는꽃의 오후꽃은 하루종일 비에 젖어도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창백하게 흘러내릴 듯순한 얼굴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내가 화가가 된 것은 모두 꽃 덕분이다.”
봄이 절정에 이르면 자고로 “산은 높아지려 하지 않아도 위로 솟아오르”게 마련이다. 또한 “물은 깊어지려 하지 않아도 아래로 흘러내리”는 게 자연의 이치이며 오묘한 섭리이다. 안도현 시의 압권은 내 보기엔 이 구절이 최고다.몽유도원도/안도현두꺼비가 바위틈에 숨어 혼자 책 읽는 소리복사꽃들이 가지에 입술 대고 젖을 빠는 소리버드나무 잎사귀는 물을 밟을까봐 잠방잠방 떠가고골짜기는 물에 연둣빛 묻을까봐 허리를 좁히네눈썹 언저리가 돌처럼 무거운 사람들아이 세상 밖에서 아프다, 아프다 하지 마라산은 높아지려 하지 않아도 위로 솟아오르고물은
이름만 얼핏 보고는 남잔 줄로 막연히 알았었다. 입때껏 남잔 줄 알았건만 ‘그’가 아니고 ‘그녀’라서 놀랐던 적 많다.명자꽃/홍해리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너에게 가는 길은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사랑이란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별것 아닌 듯이늘 해가 뜨고 달이 뜨면환한 얼굴의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진정한 분석은 분석되지 않는 것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중략) 나의 분석은 내가 말을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걸린 모네의 그림 속 까치는 폭설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가난과 절망이란 여운을 비추는 데 반해서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소장 조속의 그림 속 까치()는 매화의 봄바람과 여유, 그리고 희망이란 여백을 제공함이 차이점이다.산오름/황인숙친구와 북한산 자락을 오른다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빨리 걷고친구는 느릿느릿,그의 기척이 이내 아득하다나는 친구에게 돌아가 걸음을 재촉한다그러기를 몇 번, 기어이 친구가 화를 낸다산엘 왔으면, 나무도 보고 돌도 보고풀도 보고 구름도 보면서 걷는 법이지걸어치우려 드느냐고아하
나는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의 그 ‘사전’을 막연히 ‘辭典’으로 독자가 수용하질 않길 희망한다. 차라리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실행하기 전을 의미하는 ‘事前’으로 간신히 붙잡아주길 속삭인다. 더 나아가서 ‘辭箋’으로 고쳤으면 욕망한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진은영봄, 놀라서 뒷걸음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
지금까지 내가, 본 신윤복의 그림 는 모두 헛것이었다. 약간 벗어나서 다시 저 그림을 살피자니 불법이라도 술집을 창업한 이유를 좀 알겠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퇴기 출신의 주모라고 해서 손님인 남정네에게 사랑을 쉽게 함부로 주지는 않을 것이다.진달래꽃/김소월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아름 따라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누군가를 만나 과거보다 더 완
유자효의 「아직」은 떠나버렸거나 잃어버렸거나, 혹은 놓친 사랑에다가 대놓고 절규하는 남자의 속 깊은 진심어린 목소리에서 시의 화자로 잘 어울린다.아직/유자효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보라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아직은 아니다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작약의 꽃말은 부끄러움이다. 작약을 사서 꽃을 피워본
사랑할 애인을 지금 잃어버린 사람. 나로서는 어쩌지 못하는 헤어짐의 이별, 그 아픔을 고스란히 한번쯤 감당해봤던 독자를 향해서 박준의 「선잠」은 방아쇠를 당긴다. “그해”라고 읽어가는 순간부터 돌연 떠오르는 과거 이성을 목격한다. 나의 첫사랑, 연애 시절을 무릇 돌아보게 되돌린다.선잠/박준그해 우리는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같은 음식을 먹고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
문제는 마음이다. 마음이 몸보다 먼저 늙어가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존 슬로안의 그림과 박형준의 시를 통해서 나는 풋사랑에 빠지는 봄비 내리는 삼월을 기대하고 또 희망한다.봄비 지나간 뒤/박형준봄비는간질이는 손가락을 갖고 있나?대지가 풋사랑에 빠진 것 같다꽃보다 먼저 물방울이나무의 몸을 열고 있다물방울마다 가득무지개가 돌고 있다공원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그 속에 방울방울 떠다닌다“언어는 촉각의 은유에 젖어 있다. 우리는 감정을 느낌이라고 부르고, 무엇인가 접촉할 때 신경이 곤두선다. 인생에는 가시 돋친 문제, 간지러운 문제,
그림 속 소녀와 시적 화자는 지금 이 순간, 꽃만 본 것이 아니다. 얼굴, 내심에 감춘 속내가 드러나는 “마알간 낯바닥”에 본능적으로 주의집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주의집중은 우리의 잃어버린 오감(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을 동원하게 안내한다. 이 얼마나 황홀한가. ‘옆’이 아니고 ‘곁’을 내주는 행위는, 작은 풀꽃을 닮은 벗과 사귄다는 것은…….곁/신병은늦가을 꽃의 마알간 낯바닥을한참을 쪼그려 앉아 본다벌들이 날아든 흔적은 없고햇살과 바람만이 드나든 흔적이 숭숭하다퇴적된 가루 분분한 홀몸에 눈길이 가고나도 혼자라는 생각이 정수리
여인은 관람자를 향해 힘들게 걸어오는 모습이다. 반면에 여인의 건너편 남자는 불빛이 온화하게 보이는 빌딩으로 곧장 들어갈 태세로 몹시 서두른다. 아무튼 서로 같은 방향을 같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방향이 상당히 엇갈렸다. 많이 비틀어져 있다. 그러니까 사랑이 끝나고 이별로 그 관계가 모조리 산산조각 깨진 연인의 그림처럼 독자에게 성큼 다가온다.폭설, 그 흐릿한 길/심재휘아주 떠나버리려는 듯가다가 다시 돌아와 소리 없이 우는 듯이눈이 내린다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뛰어가다가 뒤돌아서서폭설이 퍼붓는 길이다 그러면 이런 날은붉은 신호
이번 주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설날이 내려온다. 닥쳐온다. 그것도 음력 정월 1월 하고도 1일 되려니 진짜 호랑이(壬寅年·2022년) 발자국이 제야(除夜)에 이르러 하늘에서 눈까지 내렸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백두대간을 타고 큰 코를 벌름벌름 흠흠거리면서 어슬렁어슬렁 북한산 어느 집 마당이 보이는 소나무 아래쯤에 호랑이가 신새벽이 오면 아무도 모르게 슬쩍 다녀가지 않겠는가.노변 정담/이시영황석영씨 얘기 중에 좀 ‘쎈 구라’가 있었는데 그 중하나가 호랑이 발자국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신혼 시절우이동 계곡에 살 때 밤새도록 단편을 쓰
‘꽃’이 은유하는 것은 청춘 남녀의 ‘사랑’으로 확대되고 투영된다. 이를테면 석 달 동안 붉게 피었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뚝, 지는 동백꽃 같은 이별의 경험이 있다고 한다면 선운사의 동백꽃은 독자에게 아주 각별하고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선운사에서/최영미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그대가 처음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 가는 그대여꽃이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창이더군“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이 가난한